목요일, 10월 15, 2020

[박철민의 풍찬노숙] 진영이 아닌 정의의 이름으로 말하고 싶다.

욕망의 무리가 감히 역사의 진보를 말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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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그리고 사군자

방향타를 잃고 거대한 폭풍우 속에 망망대해를 헤매고 있는 대한민국호의 현실이지만, 그래도 자연의 법칙은 어김없이 우리를 가을의 한 복판으로 잠시 내려 놓는다. 작년 이때쯤 사 온...

[박철민의 풍찬노숙] 진영이 아닌 정의의 이름으로 말하고 싶다.

‘역사(歷史)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對話)’라고 해서, ‘필연(必然)이 우연(偶然)을 가장하고 나타난다.’라고 카아(Edward Hellett Carr)가 대학 기초 교양서인 “역사란 무엇인가?” 에서 말했다고 해서, 역사에 발전이라는 단어를 부여할...

‘역사(歷史)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對話)’라고 해서, ‘필연(必然)이 우연(偶然)을 가장하고 나타난다.’라고 카아(Edward Hellett Carr)가 대학 기초 교양서인 “역사란 무엇인가?” 에서 말했다고 해서, 역사에 발전이라는 단어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인가?

발전(發展)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세상을 넓게 펴 나간다’는 말인데, 국가의 역사가 넓게 펼쳐진다는 의미는 과연 무슨 뜻일까?

시절이 하도 뒤숭숭하여 중고생 학원에서 입시를 가르치던 어떤 역사 강사가, ‘선을 넘는 사람들’ 같은 예능프로에서 연예인들을 상대로 감히 대한민국의 역사를 입시적으로 강의한다고 해서, 이 나라의 역사발전에 과연 어떤 도움이 되는가?

‘역사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여 과거로 회귀(回歸)시키고 있다.’라는 말은 차라리 쓰고 싶지 않다. 역사의 낀세대로, 1970년대 ‘새벽종이 울리고 새 아침이 밝으면 너도 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꿔야 했’던 시대를 너무도 잘 아니까 말이다.

대한민국이 길을 잘못 들었거나 표류하는 동포를 총으로 쏴 죽이고 화형한 후, ‘이런, 미안해!’ 한마디로 시침 떼거나 자신의 형과 삼촌을 시해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나라는 적어도 아니라고 믿는다. 그런 폭군을 계몽군주라고 미화하는 관종형 자칭 지식인이 판을 쳐도 아무렇지도 않은 나라라고도 믿고 싶지 않다.

비록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돌격대와 같이, 일요일 아침이면 일가족 중 단 한 명이라도 낫이나 삽, 또는 빗자루를 가지고나와 청소하고 건설하던 시대였고, 아무도 나오지 않는 집은 1,000원의 벌금을 이장에게 물었던 유신독재의 어두운 시대에도 분명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자유는 있었다.

당연한 역사지만 그때는 분명 인권적으로는 암울한 구석이 엄청 많이 있었다. 길가에서 10대 학생들이 손만 잡고 다녀도 무기정학을 받았고, 반 정부적인 얘기를 했다거나, 유신체제를 대놓고 비판했다거나, 대통령을 모욕하는 발언을 했다가는 북조선의 오호담당제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어느 안가로 끌려가 반병신이나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던 시절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철학을 얼버무린 설익은 작품이라거나 설계자인 아키텍트, 구세주 네오 등은 모두 백인이고, 용맹한 전사들(모피어스, 니오베 등)은 모두 흑인이며, 오라클 상의 혁신을 좌우할 개발자인 키메이커가 동정을 금할 수 없는 전형적인 일본 왜소족으로 그려졌다고 해서, 철학과 신학, 신화의 결정체이자 관념의 매력 덩어리인 워쇼스키 형제(지금은 자매)의 ‘매트릭스’를 폄하(貶下)할 수 있을까?

코엔이나 워쇼스키 만큼의 생산성 있는 작품들을 양산할 능력이 있는 우리 감독이 얼마나 되나?
감히 말하지만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능가할 대하소설은 없고, ‘호수’와 ‘향수’에 빚을 진 정지용의 서정을 능가할 자신들이 없는 시인이거나,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보다 더 연구대상이 되는 소설을 발표하거나, 이문구의 ‘관촌수필’ 속 말의 성찬을 따라할 수 없는 작가라면 필자처럼 다 그렇고 그런 작가인 것이다.

그래서 비록 철학덩어리에 불과하든, 잘 짜맞춘 바둑판이었든, 영화 <매트릭스>는 소중한 자산인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구원의 성령인 오라클은 네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오야, 넌 물어보러 온 것이 아니라 확인 하러 나에게 왔지? 그래 확인시켜 줄게. 세상에는 불변하는 것도 있겠지만 변하는 것이 더 많은 법이란다.”

매트릭스의 설계자 아키텍트는 또 네오에게 이렇게 들려주었지 않는가? ‘지구상에서 매트릭스는 늘 존재해 왔고, 여기 있는 너 네오는 여섯 번째 구원자’라고 말이다. 따지고보면 그것은 현세불(現世佛)인 석가모니가 여덟 번째 부처인 것과 맥을 같이 하는 수사가 아닌가?
그렇다. 결국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소크라테스 이래의 모든 철학과 종교, 신화를 뜨개질한 것이든, 기계문명에 대한 인간적인 성찰(省察)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 처음에 열거한 카아와 역사의 회귀에 대한 문제, 바로 그것을 매트릭스 영화의 페르소나인 오라클의 입을 빌려 말하려 했던 것이다.
매트릭스에서 오라클이 네오처럼 구원자인지 프로그램의 일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녀가 이렇게 애기하고 네오가 그녀로부터 자문을 얻는 걸로 봐서는 설계자 또는 구원자라는 암시를 주는 것뿐이다. 오라클이 네오에게 한 말을 한 번 더 들어보자.
“네오야! 힘을 가진 자는 늘 그 힘에 굶주려 있게 마련이야. 그래서 결국은 그 힘에 의해 망하게 되는 거지.”

나는 우리 사회의 진보가 어둠의 차양막을 걷지 못하는 이유로, 진보의 참의미를 잘못 해석하고 도덕을 전면에 세운 위선과 인간적 욕망을 벗겨내지 못하고 끼리끼리의 문화까지 덧칠한 자들의 아만과 아상을 곁들인 추한 오만(傲慢)을 들었다.

즉, 잘못된 사회를 혁신적으로 변화시키고 물러날 줄 아는 용기 있는 지성은 결여된 체, 세상에 들이밀어 오히려 세상을 가지려하는 일그러진 초상의 못남을 비판한 것이다. 진보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 그리고 더불어 사는 지혜’에 대한 겸손 없는 진보는 거짓이며, 필연적으로 잘못된 길(분열된 사회를 만드는)을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매트릭스 3부작 왼결편에서 구원자 네오는 현실의 눈을 잃고 마음의 눈을 얻는다. 그런 후 비로소 품위 있는 성찰을 통한 마음의 눈을 통해 구원의 손길을 뻗는다. 그리고 그 손길이 인간의 사회를 존속하게 해준 바로미터였다.

“버려야 사는 것이다. 쥐고 있는 자들이 쥔 것을 놓기 싫어 현실을 옭죄인다면, 쥐여진 자들의 길은 자명하다. 새로운 길을 여는 것이다. 쥔자들의 손을 과감히 뿌리치고 쥐어질 필요가 없는 전혀 새로운 나만의 우주(宇宙)를 창조하면 되는 것이다.”

코리아뉴스투데이 박철민 편집위원 chulminpark@koreanewstoda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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