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멸망과 이승만 박정희

[김필재/조선은 스스로 망한 나라이다(2)]

일제치하(日帝治下) 1920년대 조선의 인구는 2천만 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교육을 받은 사람은 1%에 불과했다고 한다. 즉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글을 읽을 수 없었다고 봐야 한다.

일례로 1922년 1월5일자 <동아일보> 사설을 보면 “신문 한 장은 고사하고 일상 의사소통에 필요한 서신 한 장을 능수하는 자가 역시 100인에 1인이면 다행이라 하겠도다”라며 참담한 조선인들의 문맹(文盲)상태를 지적하기도 했다.

조선 말의 문맹률은 日帝시대인 1920년대 문맹률(조선시대 인구의 95%가 글을 읽지 못했다고 함)과 거의 변함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은 가히 1~5%만을 위한 국가였다. 조선은 스스로 망한 것이다. 일본을 탓할 것도 없다. 그럼 일본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개항(開港) 전 일본인들의 전반적인 의식수준은 조선과 비교해 이미 서양(西洋)문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본의 국민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幕府 시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일본인들의 비율은 70%나 됐다. 당시 일본인들의 약 10%는 사무라이였는데 이들은 識者계급이었다. 농·상·공에 종사한 사람도 문자(文字)를 알았다”고 밝히고 있다.

명치유신(明治維新) 이전 도쿠가와 幕府시대 사무라이들을 칼부림이나 하는 무식한 사람들로 일본을 잘못 보는 경우도 없다. 明治維新기의 일본인들은 양반이 다스리던 조선조 백성들보다도 문맹률이 훨씬 낮았다. 특히 지방 영주 등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남긴 글과 예술품들을 봐도 그 수준이 매우 높아 이들이 全人的 교양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朝鮮이 신미양요(辛未洋擾)와 병인양요(丙寅洋擾)를 통해 척화비 세우기에 열을 올리기 훨씬 전인 1774년 네덜란드로부터 들여온 서양 의학서적을 사전과 통역 없이 장장 4년에 걸쳐 일본어로 번역해냈다.

‘해체신서’(解體新書)로 알려진 이 의학(醫學) 서적을 번역한 사람은 스키타 켄바쿠(杉田玄白 )란 인물로 그와 그의 동료들이 도전한 네덜란드 의학서적의 원제는 ‘Tafel Anatomy’였다. 解體新書가 번역되면서 일본의 의학기술은 급속하게 발전했으며, 난학(蘭學, 네덜란드 학문) 보급의 계기가 됐다. 그러나 번역은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겐바쿠가 이 의학서적을 번역하려고 했던 이유는 인체 해부가 그 계기였다고 한다. 손에 넣은 ‘타펠 아나토미아’의 해부도가 눈앞의 인체와 모두 일치했기 때문이다.

겐바쿠 등은 서양 의학서적의 이 같은 정확성에 놀라 번역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번역을 시작하자 “노와 키가 없는 배를 대해로 끌고 나온 것처럼 망망대해에서 의지할 데 없이 기가 막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그 어려운 의학서적을 어떻게 번역했을까? 당시 겐바쿠는 의사였기 때문에 책 사이에 끼여 있는 인체(人體)해부도를 보고 장기(臟器)의 명칭을 대조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렇게 번역한 장기명(臟器名)을 모두 본문에 대응시키고 번역팀 내에서 네덜란드어를 가장 잘하는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가 알고 있는 모든 단어를 일본어로 번역시켰다.

그러나 처음에는 “눈썹은 눈 위에 난 털이다”라는 문장 하나도 풀지 못한 채 몇날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기를 1년을 버티자 하루에 10줄 정도를 번역할 수 있게 됐고, 4년 동안 총 11회에 걸친 수정을 거쳐 1774년 마침내 ‘解體新書’를 간행했다.

‘解體新書’를 만들면서 일본어에 없는 새로운 단어도 많이 만들어졌는데, 거의 한자(漢字)로 조어됐으며 신경-연골-동맥 같은 것은 오늘날에 다른 한자문화권에 퍼져 쓰이고 있다.

‘쇄국’(鎖國)이란 단어는 1801년 시키키 다다오가 캠벨의 일본지(日本志)를 번역할 때 처음 사용한 것이 최초였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 막부는 동시대의 조선왕조와 달리 활발하게 국제교류를 추진하고 무역을 했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중국, 루큐(現 오키나와 섬)가 교역대상국이었다. 특히 일본이 수출한 동(銅)의 경우 유럽 경제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동전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화폐로 유통됐다. 인도네시아 발리 섬 등에서는 소화(昭和) 시대 초기까지 일본의 동(銅)이 사용됐다. 일본은 또 국제무역을 통해 국내에도 수많은 상품을 수입했다.

예를 들어 에도의 유력 상인은 외제(外製) 향수를 바르고 산호 비녀를 꽂고 유리잔에 와인을 마셨다고 한다. 한편,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吉川宗, 1716~1745년)의 시대에는 외국상품에 대한 수입제한(輸入制限)이 완화되어 漢字로 번역된 유럽서적을 비롯해 페르시아어, 베트남의 코끼리와 낙타 등 진기한 동물까지 유입됐다.

요시무네는 또 스스로 천문학(天文學), 역학(曆學), 법학(法學)을 익혀 스스로 강우량을 조사해 홍수를 예상했으며, 서양식 승마를 배우고 부하에게 네덜란드어를 배우게 했다.

일본의 현대화를 상징하는 키워드로 흔히 화혼양재(和魂洋才)를 내세운다. ‘일본의 정신’에다 ‘서양의 기술’을 합쳤다는 뜻이다. 일본인들의 이 같은 정신은 서양 학문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그대로 반영됐다. 일례로 ‘철학’(哲學)이란 단어는 일본인들이 서양서적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든 단어다. 계몽가 니시 아마네(西周)가 명치유신 초기 ‘백일신론’(百一新論)이란 저서에서 서양 개념인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한 것이 처음이었다.

‘사회’(社會)도 마찬가지다. 신문기자 후쿠치 겐이치로(福地源一郞)가 1875년 마이니치(每日)신문에 사용하면서 서양 개념인 ‘society’에 해당하는 동양 한자권의 언어로 정착됐다. 물론 일본인들의 이 같은 조어(造語)능력의 원천은 漢字를 사용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韓日양국을 비교하면서 흔히들 빠지는 한 가지 착각이 있다. 그것은 바로 ‘朝鮮이 쇄국정책(鎖國政策)을 버리고 日本보다 먼저 개항(開港)을 했더라면 이후의 역사(歷史)는 크게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歷史에 假定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스스로의 과거(過去)와 현재(現在)를 객관화(客觀化)하는 방법부터 배워야 한다. 아울러 일본과의 격차를 줄인 이승만의 건국(建國), 박정희의 근대화(近代化)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그리고 노예국가 北韓이 아니라 大韓民國에서 태어난 것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이승만 대통령은 의무교육제도입 등 근대적 교육제도의 완비를 통해 교육적 기적을 이뤄냈다. 李 대통령의 혁명적 교육개혁결과 해방직후 78%였던 문맹률은 1959년에는 10%로 급감됐으며, 대학생의 수는 12배나 증가해 고도성장의 기초가 됐다. 휴전직후 엄청난 재정적 압박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으로 초등학교교사들의 봉급을 삭감하는 안건을 李대통령이 강력하게 제지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교육에 대한 李대통령의 열정은 탁월했다.

글: 김필재 spooner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