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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군인 없는 '이재수 빈소'

작성자
hwlee8
작성일
2018-12-17 06:10
조회
181
15년 전 정치인 허주(虛舟) 김윤환이 세상을 떴을 때 상가(喪家)의 밤은 적막했다. 노태우, 김영삼을 대통령으로 만든 '킹메이커'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허주의 집은 원래 정초만 되면 손님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하지만 2000년 총선에서 이회창과 갈라서면서 정치적 세(勢)를 잃은 그는 몇 해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등졌다. 빈소를 찾은 몇몇 정치인은 누가 볼 세라 잠깐 얼굴만 비치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밤 영정 앞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사람들은 "세상인심이 이럴 수는 없다"면서 '정승 집 개' 속담을 입에 올렸다. '염량세태(炎凉世態)'를 가장 극명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정치인 본인상(喪) 빈소다. 권세 있는 사람 부모상에는 발 디딜 틈이 없지만 정작 본인상 빈소는 찬바람이 휭 돈다.

전우애(戰友愛)를 생명처럼 여기는 군인은 다를 줄 알았다. 어제 발인을 한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 상가에는 나흘간 전직 국방장관, 예비역 장성들이 발걸음을 했다. 하지만 현직 군 수뇌부는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군 수뇌부만이 아니었다. 현역 군인은 거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고인은 40년 군 생활 동안 육군 인사사령관, 국군 기무사령관, 3군 부사령관을 지내고 불과 2년 전 전역했다. 그런 그의 상가에서 가장 많이 오간 말이 "군인들의 의리가 이럴 수 있느냐"는 탄식이었다.

그런 와중에 현역 대령 한 명이 조문을 다녀갔다. 육군 정복을 입은 그는 고인 영정에 거수경례를 올리고 유족을 위로한 뒤 잠시 빈소에 머물다 자리를 떴다. 의아했던 한 조문객이 그에게 다가가 "어떻게 이곳에 올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다. 망설이던 그는 "소신대로 살려 한다"고 답했다.

어쩌다 현역 군인이 선배 전우를 조문하는 데 소신이 필요한 세상이 됐을까. 고인은 현 정권의 무리한 '적폐 수사'에 표적이 됐는데, 수갑이 채워진 채 영장 실질 심사장 포토라인에 세워졌다가 나흘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군인은 진급에 목을 걸고 산다. 정권 눈 밖에 나면 진급 길이 막힌다. 그러니 정권에 '찍힌' 고인은 세상을 떠난 마당에도 가까이해선 안 될 기피 인물이었을 것이다.

요즘 군을 샐러리맨화됐다고 하는데 누구는 샐러리맨에 대한 모욕이라고 했다. 이렇듯 나약하게 정권 눈치를 살피는 군이 쿠데타를 도모했다고 법석을 벌였다. 블랙 코미디다.

출처: 조선일보

[만물상] 현역 군인 없는 '이재수 빈소'
최경운 논설위원조선일보 A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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